병력 동원에만 1년···우리가 몰랐던 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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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38회 작성일 24-07-03 10:12본문
지금 일이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위급하며 형세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듯하니, 지금이야말로 긴급한 때입니다. 하물며 저들은 강화한 지 몇 년이 되어 별다른 일 없이 편안하지 않았습니까.
정유재란(1597~1598) 당시 명군 최고 지휘관 형개(邢玠·1540~1612)가 1597년 8월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게 보낸 상주문(황제에게 올리는 보고문)에는 병력 동원을 서둘러달라는 급박한 호소가 담겨 있다. 형개는 명나라 각지에서 병력을 징발해 속히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면서 길이 멀어서 늦어져 일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된다고 썼다. 이 무렵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궤멸하고 남원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이 기세를 올리던 시기다.
이 같은 내용은 형개가 정유재란을 수행하면서 인스타 팔로워 작성한 공문서들을 모아 1601년 발간한 <경략어왜주의(經略禦倭奏議)>에 실려 있다. <경략어왜주의>는 정유재란 당시 명군의 대응, 병력과 물자 조달, 전황, 논공행상을 둘러싼 명군 내부의 갈등, 전후 처리 과정 등을 명나라의 시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구범진, 김창수, 박민수, 이재경, 정동훈 등 한중관계사료연구팀 학자들이 이를 번역하고 주석을 덧붙인 역주서 <명나라의 정유전쟁>(사회평론 아카데미)이 최근 출간됐다. 총 4권으로 이뤄진 <명나라의 정유전쟁>은 국립진주박물관이 2017년부터 추진 중인 ‘임진왜란자료 국역사업’의 세 번째 성과물이다. <경략어왜주의>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형개의 상주문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전쟁에서 병사들이 직접 충돌하는 전투는 기나긴 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정동훈 서울교대 교수(사회과교육과)는 명나라는 1597년 초 파병을 결정했지만 조선땅으로 보내는 데만 1년 이상 걸렸다고 말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오면서 병사들을 먹이고 재우고 도망친 병사들을 잡아와야 했습니다. 흔히 전쟁이라고 하면 <삼국지>의 ‘적벽대전’ 같은 전투를 떠올리지만, 이런 번거롭고 소소해 보이는 일들이 신출귀몰한 작전이나 적장의 목을 베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전쟁의 실상에 가까운 문제들이었던 겁니다.
이역만리 조선으로 파병된 명군이 겪는 어려움들도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박민수 교수(이화여대 사회과교육과)는 명군이 조선에서 고생을 많이 하는 와중에 월급을 은이 아니라 곡식으로 받게 되면서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들도 나온다면서 명군이 조선에서 횡포를 많이 부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명군 지휘부 일부가 전투의 공적을 과장했다는 혐의로 명 조정의 감찰관으로부터 탄핵되고 형개가 이를 옹호하는 과정은 전과를 둘러싼 정치 투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김창수 교수(전남대 사학과)는 당시는 정보가 제한된 시대여서 공적을 과장하더라도 확인이 안 됐다면서 공적을 과장하는 현상은 명군과 일본군 양측에서 모두 발생했다고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의 철군으로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명군의 조선 주둔 문제가 불거진다. 이재경 박사(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동아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는 정유재란 초반 명군이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군대를 남겨두려 했다면서 완전 철군을 하느냐 병력을 남기느냐, 남긴다면 얼마나 남길 것이며 주둔 비용은 어떻게 댈 것이냐 등의 문제를 놓고 명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한중관계사료연구팀은 중국근세사를 전공한 구범진 교수(서울대 역사학부)와 그에게서 논문 지도를 받거나 그의 강의를 들은 소장 학자들이 함께 사료를 읽고 토론하기 위해 10여년 전 만든 공부 모임이다. 이들은 앞서 2020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최고 지휘관 송응창(宋應昌·1536~1606)의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을 역주한 <명나라의 임진전쟁>을 펴낸 바 있다.
<경략복국요편>이나 <경략어왜주의>는 근대 이전 한·중·일이 벌인 유일한 전면전이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사자인 명의 입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다. 이와 관련해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측 사료를 국역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구 교수는 이것 말고도 전쟁 당시 조선과 명나라가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외교문서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면서 이런 사료들을 우리말로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빨리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유재란(1597~1598) 당시 명군 최고 지휘관 형개(邢玠·1540~1612)가 1597년 8월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게 보낸 상주문(황제에게 올리는 보고문)에는 병력 동원을 서둘러달라는 급박한 호소가 담겨 있다. 형개는 명나라 각지에서 병력을 징발해 속히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면서 길이 멀어서 늦어져 일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된다고 썼다. 이 무렵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궤멸하고 남원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이 기세를 올리던 시기다.
이 같은 내용은 형개가 정유재란을 수행하면서 인스타 팔로워 작성한 공문서들을 모아 1601년 발간한 <경략어왜주의(經略禦倭奏議)>에 실려 있다. <경략어왜주의>는 정유재란 당시 명군의 대응, 병력과 물자 조달, 전황, 논공행상을 둘러싼 명군 내부의 갈등, 전후 처리 과정 등을 명나라의 시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구범진, 김창수, 박민수, 이재경, 정동훈 등 한중관계사료연구팀 학자들이 이를 번역하고 주석을 덧붙인 역주서 <명나라의 정유전쟁>(사회평론 아카데미)이 최근 출간됐다. 총 4권으로 이뤄진 <명나라의 정유전쟁>은 국립진주박물관이 2017년부터 추진 중인 ‘임진왜란자료 국역사업’의 세 번째 성과물이다. <경략어왜주의>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형개의 상주문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전쟁에서 병사들이 직접 충돌하는 전투는 기나긴 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정동훈 서울교대 교수(사회과교육과)는 명나라는 1597년 초 파병을 결정했지만 조선땅으로 보내는 데만 1년 이상 걸렸다고 말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오면서 병사들을 먹이고 재우고 도망친 병사들을 잡아와야 했습니다. 흔히 전쟁이라고 하면 <삼국지>의 ‘적벽대전’ 같은 전투를 떠올리지만, 이런 번거롭고 소소해 보이는 일들이 신출귀몰한 작전이나 적장의 목을 베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전쟁의 실상에 가까운 문제들이었던 겁니다.
이역만리 조선으로 파병된 명군이 겪는 어려움들도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박민수 교수(이화여대 사회과교육과)는 명군이 조선에서 고생을 많이 하는 와중에 월급을 은이 아니라 곡식으로 받게 되면서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들도 나온다면서 명군이 조선에서 횡포를 많이 부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명군 지휘부 일부가 전투의 공적을 과장했다는 혐의로 명 조정의 감찰관으로부터 탄핵되고 형개가 이를 옹호하는 과정은 전과를 둘러싼 정치 투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김창수 교수(전남대 사학과)는 당시는 정보가 제한된 시대여서 공적을 과장하더라도 확인이 안 됐다면서 공적을 과장하는 현상은 명군과 일본군 양측에서 모두 발생했다고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의 철군으로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명군의 조선 주둔 문제가 불거진다. 이재경 박사(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동아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는 정유재란 초반 명군이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군대를 남겨두려 했다면서 완전 철군을 하느냐 병력을 남기느냐, 남긴다면 얼마나 남길 것이며 주둔 비용은 어떻게 댈 것이냐 등의 문제를 놓고 명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한중관계사료연구팀은 중국근세사를 전공한 구범진 교수(서울대 역사학부)와 그에게서 논문 지도를 받거나 그의 강의를 들은 소장 학자들이 함께 사료를 읽고 토론하기 위해 10여년 전 만든 공부 모임이다. 이들은 앞서 2020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최고 지휘관 송응창(宋應昌·1536~1606)의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을 역주한 <명나라의 임진전쟁>을 펴낸 바 있다.
<경략복국요편>이나 <경략어왜주의>는 근대 이전 한·중·일이 벌인 유일한 전면전이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사자인 명의 입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다. 이와 관련해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측 사료를 국역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구 교수는 이것 말고도 전쟁 당시 조선과 명나라가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외교문서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면서 이런 사료들을 우리말로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빨리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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